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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sights
에이전트 시대 Vol.3 산업

Vol. 3 · Chapter 04

제3장. 전공정 장비 — 기술 권력의 정점

김정기 · JK2026년 8월 6일Vol 3 · Chapter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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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전공정 장비 — 기술 권력의 정점

이 장을 다 읽고 나면 알게 될 것: 반도체 전공정 장비 시장의 독점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왜 ASML의 EUV 노광기가 지정학의 핵심 무기가 되었는지

도입: 대당 4,000억 원짜리 기계

네덜란드 벨트호벤에 ASML이라는 회사가 있다. 이 회사가 만드는 기계의 가격은 대당 약 4,000억 원에 달한다. 무게는 150톤이다. 운송에 보잉 747 화물기 3대가 필요하다. 설치에 6개월이 걸린다. 그리고 이 기계를 만들 수 있는 회사는 지구상에 ASML 단 하나뿐이다.

EUV(극자외선) 노광기다. 이 기계 없이는 7나노미터 이하 최첨단 반도체를 만들 수 없다. NVIDIA의 H100도, 애플의 M4도, 퀄컴의 스냅드래곤 8 Gen 4도 이 기계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 회사가 한 기계를 독점한다. 그 기계 없이는 산업이 돌아가지 않는다. 이보다 완벽한 독점은 산업사에서 찾기 어렵다. 그리고 이 독점은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이 장에서는 반도체 전공정 장비의 세계로 들어간다. 기술 권력의 정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본다.

3.1 전공정이란 무엇인가

반도체 제조는 크게 전공정과 후공정으로 나뉜다. 전공정은 빈 웨이퍼 위에 회로를 새기는 과정이다. 후공정은 그 웨이퍼를 잘라 포장하는 과정이다.

전공정은 수백 단계로 이루어진다. 핵심 공정은 네 가지다. 노광(Lithography), 식각(Etch), 증착(Deposition), 검사(Inspection). 이 네 가지 공정이 수십 번에서 수백 번 반복된다. 한 장의 웨이퍼가 완성되기까지 2~3개월이 걸린다.

각 공정에 전용 장비가 필요하다. 노광에는 노광기, 식각에는 식각기, 증착에는 증착기, 검사에는 검사장비. 이 장비들의 총 가격이 하나의 반도체 공장(팹)을 짓는 비용의 70~80퍼센트를 차지한다. 최첨단 팹 하나를 짓는 데 30조 원이 넘는다. 그중 20조 원 이상이 장비값이다.

그래서 장비를 누가 만드느냐가 반도체 산업의 권력 구조를 결정한다.

3.2 ASML — EUV 독점의 형성

ASML의 독점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30년의 축적이다.

1984년 필립스에서 분사한 작은 회사가 시작이었다. 1990년대까지 ASML은 일본 니콘, 캐논에 밀리는 3위 업체였다. 노광기 시장에서 일본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ASML이 판을 뒤집었다. 차세대 기술인 EUV에 올인했기 때문이다.

EUV 노광 기술은 극자외선(파장 13.5나노미터)을 이용해 회로를 그린다. 원리는 현미경과 같다. 파장이 짧은 빛을 쓸수록 더 작은 물체를 구분할 수 있다. 기존 ArF 광원(파장 193나노미터, DUV라 부른다)과 비교하면 14분의 1 수준으로 짧다. 덕분에 DUV로는 최소 40나노미터 패턴이 한계였다면, EUV는 7나노미터 이하까지 가능하다.

문제는 이 기술이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다는 것이었다. EUV 광원을 만드는 것 자체가 난제였다. 초당 5만 번 주석 방울에 레이저를 쏴서 플라즈마를 만들어야 한다. 반사 거울의 표면 정밀도는 원자 수준이어야 한다. 독일 칼자이스가 이 거울을 만든다.

ASML은 20년간 100억 유로 이상을 EUV 개발에 투자했다. 인텔, TSMC, 삼성이 개발비를 분담했다. 니콘과 캐논은 EUV 개발을 포기했다. 너무 비싸고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ASML만 남았다.

2019년 EUV가 본격 양산에 들어갔다. TSMC의 7나노 공정부터 EUV가 쓰였다. 5나노, 3나노로 내려갈수록 EUV 레이어 수가 늘어났다. 이제 최첨단 칩은 EUV 없이 만들 수 없다.

독점이 완성되었다.

3.3 장비 빅4 — 식각, 증착, 검사의 세계

노광기는 ASML이 독점하지만, 다른 장비는 미국과 일본이 나눠 가진다.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Applied Materials). 세계 최대 반도체 장비 회사다. 증착, 식각, CMP(화학적 기계적 연마) 장비를 만든다. 특히 박막 증착 분야에서 압도적이다. 매출의 절반 이상이 중국, 한국, 대만에서 나온다.

램 리서치(Lam Research). 식각 장비의 왕이다. 플라즈마 식각에서 글로벌 점유율 50퍼센트 이상. 3D 낸드 플래시 제조에서 특히 중요하다. 삼성과 SK하이닉스의 낸드 공장에 램 리서치 장비가 빼곡하다.

KLA. 검사와 계측 장비의 절대 강자다. 반도체 결함을 찾아내는 장비를 만든다. 공정이 미세해질수록 검사가 더 중요해진다. 3나노 공정에서 원자 수개 차이의 결함을 찾아야 한다. KLA의 점유율은 검사·계측 분야에서 55퍼센트를 넘는다.

도쿄일렉트론(Tokyo Electron, TEL). 일본 장비의 자존심이다. 코터/디벨로퍼(포토레지스트 도포/현상 장비)에서 85퍼센트 이상의 점유율을 가진다. 이 장비는 ASML 노광기 바로 옆에 붙어 일한다. ASML 없이 TEL이 필요 없고, TEL 없이 ASML도 쓸 수 없다.

이 네 회사와 ASML을 합치면 전공정 장비 시장의 70퍼센트 이상이다. 과점 중의 과점이다.

잠시 멈추고 생각해보자 반도체 장비 시장은 극소수 회사가 지배한다. 새로운 회사가 진입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기술만의 문제인가, 아니면 고객 관계와 생태계의 문제이기도 한가?

3.4 한국의 장비 회사들 — 세메스와 원익IPS

한국에도 반도체 장비 회사가 있다. 대표적인 회사가 세메스와 원익IPS다.

세메스는 삼성전자의 자회사다. 세정 장비, 코터/디벨로퍼, 식각 장비를 만든다. 매출의 대부분이 삼성 내부에서 나온다. 이것이 강점이자 약점이다. 안정적인 수요가 있지만, 삼성 밖으로 나가기 어렵다.

원익IPS는 증착 장비에서 한국 시장 점유율이 높다. PECVD(플라즈마 화학기상증착) 장비가 주력이다. 삼성과 SK하이닉스 모두에 납품한다. 그러나 글로벌 시장에서의 점유율은 아직 낮다.

한국 장비 회사들의 한계는 명확하다. 첫째, 핵심 장비(노광기, 고급 식각기, 정밀 검사장비)는 만들지 못한다. 둘째, 내수 의존도가 높다. 셋째, R&D 투자 규모가 글로벌 빅4에 비해 한 자릿수 차이가 난다.

그러나 역할은 있다. 범용 장비에서 가격 경쟁력을 제공한다. 삼성과의 긴밀한 협업으로 맞춤형 장비를 빠르게 개발한다. 글로벌 장비 회사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틈새를 메운다.

문제는 이 역할이 AI 시대에 충분한가다. AI 반도체의 핵심 공정이 더 어려워지고 있다. HBM의 TSV 공정, 3나노 이하의 GAA(Gate-All-Around) 구조. 이런 최첨단 공정에서 한국 장비의 역할은 제한적이다.

3.5 미국의 대중국 수출통제 — 장비가 무기가 될 때

2022년 10월, 미국 상무부가 대중국 반도체 수출통제를 발표했다. 핵심은 장비였다.

미국은 자국 장비 회사(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 램 리서치, KLA)의 대중국 수출을 제한했다. 그리고 네덜란드와 일본을 설득해 ASML과 도쿄일렉트론의 대중국 수출도 제한시켰다. 2023년 1월 미국, 네덜란드, 일본이 합의했다.

왜 장비인가. 칩 자체를 수출 금지해도 중국이 자체 생산할 수 있다면 의미가 없다. 그런데 장비까지 막으면 생산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반도체 공장은 장비 없이 존재할 수 없다.

ASML의 EUV 노광기는 2019년부터 이미 중국에 수출이 금지되어 있었다. 2023년에는 구세대 DUV 장비까지 일부 제한되었다. 중국의 SMIC는 EUV 없이 7나노 칩을 만들었다고 주장했지만(화웨이 Mate 60 Pro의 기린 9000S), 수율과 비용 면에서 경쟁력이 떨어진다.

이 수출통제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장비가 국제 정치의 무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반도체 장비의 과점 구조가 소수 국가에 지정학적 레버리지를 부여했다. 미국, 네덜란드, 일본. 이 세 나라가 합의하면 어떤 나라도 최첨단 반도체를 만들 수 없다.

이런 구조는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중국은 장비 자립화를 가속하고 있다. NAURA, AMEC 같은 중국 장비 회사들이 성장하고 있다. 아직은 최첨단에 미치지 못하지만, 10년 후는 모른다. 수출통제가 오히려 중국의 자립을 촉진할 수 있다는 역설이다.

잠시 멈추고 생각해보자 기술 독점이 지정학적 무기로 전환될 때, 그 독점을 가진 회사는 어떤 위치에 놓이는가? ASML은 네덜란드 정부, 미국 정부, 그리고 자사의 이익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잡아야 하는가?

3.6 장비 산업의 미래 — High NA EUV와 그 너머

ASML의 다음 세대 기계가 이미 나왔다. High NA EUV다. NA(개구수)를 0.33에서 0.55로 높여 더 미세한 패턴을 그릴 수 있다. 가격은 대당 5,000억 원 이상이다.

인텔이 High NA EUV의 첫 고객이 되겠다고 나섰다. TSMC와 삼성도 도입을 검토 중이다. 이 기계가 2나노, 1.4나노 공정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질문이 있다. 물리적 미세화의 한계는 언제 오는가. 원자 하나의 크기가 약 0.1~0.3나노미터다. 1나노 공정이면 원자 서너 개 수준이다. 더 작아질 수 있는가.

업계의 대답은 두 갈래다. 첫째, 미세화를 계속 추구하되 새로운 구조(3D 적층, CFET)로 간다. 둘째, 미세화 대신 패키징 혁신(칩렛, 어드밴스드 패키징)으로 간다. 두 번째 길은 5장에서 자세히 다룬다.

장비 산업의 또 다른 변화는 AI 도입이다. 반도체 장비 자체에 AI가 들어간다. 공정 최적화, 결함 예측, 예방 정비. KLA의 검사장비에는 이미 AI 알고리즘이 핵심이다. 장비가 스스로 공정을 조정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이것은 매트릭스의 교차점이다. 반도체 장비(매트릭스의 2단계)에 디지털 AI(매트릭스의 다른 축)가 들어가는 것이다. 기술이 기술을 만드는 재귀적 구조. 이런 교차점이 매트릭스에서 가장 폭발력 있는 셀이다.

3.7 투자자의 시각 — 장비 사이클

반도체 장비 산업에 투자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사이클이다.

반도체 장비 수요는 팹 건설 사이클에 좌우된다. TSMC, 삼성, 인텔이 새 팹을 지을 때 장비 수주가 폭발한다. 팹 건설이 줄면 수주도 준다. 2~3년 주기의 사이클이 있다.

2024~2026년은 AI 투자 사이클이다. TSMC가 미국 애리조나에, 삼성이 미국 텍사스에, 인텔이 오하이오에 새 팹을 짓고 있다. CHIPS Act 자금이 풀리면서 장비 수주가 증가했다.

그러나 영원한 호황은 없다. AI 투자의 ROI가 증명되지 않으면 투자가 줄 수 있다. 그때 장비 회사들의 주가도 조정받을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구조적 성장이 있다. 공정이 어려워질수록 장비 가격이 올라간다. 같은 양의 칩을 만들어도 장비비가 더 많이 든다. 이것은 장비 회사에게 유리한 구조적 추세다.

ASML의 시가총액이 3,000억 유로를 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독점 + 구조적 성장 + 지정학적 레버리지. 투자자가 꿈꾸는 조합이다.


핵심 정리

ASML은 EUV 노광기를 독점한다. 이 기계 없이는 7나노 이하 최첨단 반도체를 만들 수 없다. 대당 4,000억 원, 지구에서 ASML만 만들 수 있다.

전공정 장비 시장은 ASML,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 램 리서치, KLA, 도쿄일렉트론 다섯 회사가 70% 이상을 차지하는 극단적 과점이다.

한국의 세메스, 원익IPS는 범용 장비에서 역할이 있으나 핵심 장비 시장에서의 글로벌 경쟁력은 부족하다.

미국의 대중국 수출통제는 장비를 지정학적 무기로 활용한 것이다. ASML EUV 수출 금지가 중국 반도체의 최대 병목이다.

장비 산업은 사이클을 타지만, 공정 미세화에 따른 장비 가격 상승이라는 구조적 추세가 있다.

반드시 답해봐야 할 질문 5가지

질문 1. ASML의 EUV 독점은 얼마나 지속 가능한가? 중국이 10년 내에 대안을 만들 수 있을까?

질문 2. 미국의 수출통제가 장기적으로 ASML에게 이로운가, 해로운가? 중국 시장을 잃는 것과 독점을 유지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큰가?

질문 3. 한국 반도체 장비 산업이 성장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내수 의존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한가?

질문 4. High NA EUV 이후, 물리적 미세화의 한계에 다다르면 장비 산업은 어떻게 변하는가?

질문 5. 장비 사이클에 투자할 때, AI 투자 사이클과의 관계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더 깊이 탐구하기

ASML Annual Report 및 Investor Day 자료. EUV 기술 로드맵의 1차 자료.

Chris Miller, 「칩 워」 (2022). ASML 독점의 역사와 지정학적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한 책.

미국 상무부 BIS, 반도체 수출통제 규정 원문 (2022, 2023 개정판). 수출통제의 정확한 범위와 메커니즘.

SemiAnalysis 블로그. 반도체 장비 시장의 가장 깊이 있는 분석.

Applied Materials, Lam Research, KLA 각사 Earnings Call Transcript. 장비 사이클을 실시간으로 읽는 자료.


다음 장에서는 한 단계 더 올라간다. 설계와 제조. 팹리스, 파운드리, 메모리. NVIDIA는 왜 직접 칩을 만들지 않는가. TSMC는 왜 자체 칩을 설계하지 않는가. 이 분업의 구조가 만드는 권력의 지형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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