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가을이었다. 매일경제신문 논문 공모에 한 편이 제출되었다. 주제는 글로벌 밸류체인이었다. 그때 한국에서 그 말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쓴 사람도 확신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한국 산업을 이해하려면 한국만 봐서는 안 된다. 부품이 어디서 오는가. 가공이 어디서 일어나는가. 완성품이 어디로 가는가. 이 흐름을 다 봐야 한다.
논문은 운 좋게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시각이 30년의 토대가 되었다.
쓴 사람은 몰랐다. 같은 해, 같은 1994년에 미국에서도 글로벌화를 두고 큰 논쟁이 시작되고 있었다는 것을. 이 논쟁이 앞으로 30년 동안 세계를 어떻게 바꿀지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미국에서 세 사람이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첫 번째 사람은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로자베스 모스 캔터다. 그녀는 1995년에 책을 한 권 냈다. 제목은 *세계급(World Class)*이다.1 메시지는 단순했다. 세계는 하나가 된다. 한국의 도시도, 미국의 도시도, 중국의 도시도 다 글로벌 무대 위에 선다. 그 무대 위에서 살아남으려면 세계급이 되어야 한다. 안 그러면 도태된다.
두 번째 사람은 하버드 케네디 스쿨의 대니 로드릭이다. 그는 1997년에 책을 한 권 냈다. 제목은 *글로벌화는 너무 멀리 갔는가?(Has Globalization Gone Too Far?)*다.2 캔터와 정반대였다. 그는 말했다. 글로벌화가 좋은 것만은 아니다. 미국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는다. 사회가 흔들린다. 정부가 사람들을 보호해줄 능력을 잃는다. 멈춰야 한다.
세 번째 사람은 좀 늦게 나왔다. 이름은 판카지 게마와트다. 그도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출신이다. 그는 2007년에 말했다. 너희들 둘 다 틀렸다. 세계가 하나가 됐다고? 그건 허풍이다. 글로벌화가 너무 멀리 갔다고? 멀리 가긴 어디 멀리 갔나. 실제로는 별로 안 갔다. 그는 자기 주장을 한 단어로 정리했다. "글로벌로니(Globaloney)".3 글로벌과 허튼소리를 합친 말이다. 사실 이 말은 그가 만든 것도 아니다. 1943년에 미국 의원 클레어 부스 루스가 쓴 말이다.4 60년 만에 부활했을 뿐이다.
이게 1990년대 글로벌화 논쟁이다. 세 사람. 세 가지 답.
당시 한국에서는 이런 논쟁이 잘 안 보였다. 한국은 글로벌화의 단순한 수혜자였다. 미국 시장에 물건을 팔았다. 일본에서 기술을 배웠다. 중국에 공장을 지었다. 그 흐름 한가운데에 있었다. 논쟁할 여유가 없었다.
1994년에 보였던 글로벌 밸류체인은 이 흐름이었다. 그 흐름은 단순했다. 한 사슬이었다. 부품에서 완성품까지 한 줄로 이어졌다.
30년이 지났다. 그 단순한 사슬은 어떻게 되었나.
답을 하기 전에 잠깐 멈추자.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2008년 금융위기가 터졌다. 미국 경제가 흔들렸다. 그리고 학자들이 다시 글로벌화를 들여다봤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안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1995년에 글로벌화를 옹호했던 그 학교에서, 두 교수가 정반대 얘기를 시작했다. 가리 피사노와 윌리 시다. 둘은 2009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한 논문을 썼다. 제목은 미국 경쟁력의 회복이다.5 메시지가 충격적이었다. 미국이 공장을 해외로 보낸 것은 잘못이었다. 공장을 잃으면 그 옆에 붙어 있던 연구 능력도 잃는다. 기술이 자란 마당을 잃는다.
그들은 그 마당에 이름을 붙였다. "산업 공유지(Industrial Commons)". 옛날 마을에 공동 목초지가 있었다. 거기서 양이 풀을 뜯었다. 그게 없으면 양도 못 키운다. 산업도 같다는 것이다.
그 다음 2013년에 더 큰 일이 벌어졌다. MIT의 데이비드 오터라는 경제학자가 동료들과 함께 논문을 냈다. 제목은 차이나 신드롬이다.6 그들은 데이터로 증명했다. 미국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진 이유의 절반 이상이 중국 수입 때문이다. 글로벌화가 미국 노동자를 죽인 것이 데이터로 증명된 것이다. 1997년에 로드릭이 한 말이 16년 뒤에 데이터로 증명됐다.
그러자 정치가 움직였다. 트럼프가 2016년에 대통령이 됐다. 바이든이 2022년에 칩스법(CHIPS Act)을 만들었다. 미국 정부가 반도체 공장을 미국 안에 짓겠다고 했다. 트럼프가 2024년에 다시 대통령이 됐다. 관세를 더 매겼다. 중국과 싸웠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NVIDIA의 칩을 중국에 팔게도 했다. 정책이 흔들렸다.7
그 사이, 1994년에 글로벌 밸류체인을 그렸던 그 시각으로는 어떻게 보였을까. 1994년에 그렸던 한 줄짜리 사슬이 더 이상 한 줄로 안 그려지기 시작했다.
왜 그런가.
AI 때문이다.
AI 시대의 산업은 한 사슬이 아니다. 디지털 AI와 피지컬 AI는 다른 산업이다. 같은 반도체를 쓰지만 다른 부분을 끌어다 쓴다. 같은 데이터를 다루지만 다른 방식으로 학습한다. 사슬이 여러 개다. 그 사슬들이 서로 교차한다.
그래서 매트릭스를 그리기로 했다. 반도체, 디지털 AI, 피지컬 AI. 이 세 축이 만나는 곳에 산업의 진짜 변혁이 있다.
이 매트릭스는 자연 현상이 아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다. 미국 학자 30년의 논쟁이 만들었다. 미국 정부 30년의 정책이 만들었다. 그 결과 한국 메모리 회사가 지금의 자리에 섰다. 그 결과 한국 회사들이 미국에 공장을 지으러 간다. 그 결과 매일 보는 뉴스에 반도체 수출통제 얘기가 나온다.
한국은 그 30년 동안 운이 좋았다. 정확한 자리에 서 있었다. 미국이 중국을 막자 한국 메모리가 떴다. 미국이 공장을 가져가려 하자 한국 회사가 미국에 공장을 짓는다. 그 자리는 우연인가, 실력인가. 둘 다다. 그러나 운이 절반은 됐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다음 30년에도 그 운이 계속될 것인가.
그건 다른 문제다.
이 책은 그 문제에 답하기 위한 지도다. 한국이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떤 자리가 사라지고 어떤 자리가 새로 생기는지. 그 지도가 매트릭스다.
1부에서 반도체 가치사슬의 토대를 놓는다. 2부에서 디지털 AI 가치사슬을 그린다. 3부에서 피지컬 AI 가치사슬을 그린다. 4부에서 셋이 만나는 교차점을 분석한다. 5부에서 투자자의 시각으로 정리한다.
1권이 "왜"를 물었다. 이 2권은 "어디에"를 본다. 산업의 권력은 어디로 이동하는가. 가치는 어디서 만들어지는가. 한국은 이 지도에서 어디에 서 있는가.
30년 전의 가치사슬 분석이 지금도 유효하다. 다만 사슬이 매트릭스가 되었을 뿐이다. 그 매트릭스를 읽는 법을 이 책에서 함께 배워보자.
1장에서 시작한다. 1994년의 가치사슬이 어떻게 2026년의 매트릭스가 되었는가부터. 그리고 그 사이 30년의 미국 학자들 논쟁이 그것을 어떻게 만들었는가부터.
각주
출처 전체 목록은 책 끝의 미주(Endnotes)에 번호 순서대로 모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