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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sights
에이전트 시대 Vol.1 경제

Vol. 1 · Chapter 05

제4장. 설계와 제조 — 팹리스·파운드리·메모리

김정기 · JK2026년 8월 6일Vol 1 · Chapter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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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설계와 제조 — 팹리스·파운드리·메모리

이 장을 다 읽고 나면 알게 될 것: 반도체 설계와 제조가 왜 분리되었는지, NVIDIA와 TSMC의 공생 관계가 어떻게 AI 시대의 핵심 축이 되었는지, 그리고 메모리 반도체에서 한국이 왜 여전히 강한지

도입: 설계하는 자와 만드는 자

NVIDIA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반도체 회사다. 시가총액이 3조 달러를 넘는다. 그런데 NVIDIA는 공장이 없다. 단 하나의 팹도 운영하지 않는다. 자기 칩을 자기가 만들지 않는다.

TSMC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반도체 제조 회사다. 전 세계 최첨단 칩의 90퍼센트 이상을 만든다. 그런데 TSMC는 자체 칩을 설계하지 않는다. 남의 설계를 받아서 만들어 줄 뿐이다.

이 분업이 현대 반도체 산업의 핵심 구조다. 설계하는 자(팹리스)와 만드는 자(파운드리)가 나뉘어 있다. 그리고 이 분업이 AI 시대에 가장 강력한 공생 관계를 만들어냈다.

왜 이 구조가 형성되었는가. 그리고 이 구조에서 권력은 어디에 있는가.

4.1 팹리스 — 설계의 제국

팹리스(Fabless)는 공장 없이 칩을 설계하는 회사다. 가장 유명한 팹리스 회사들을 보자.

NVIDIA. AI 시대의 절대 강자다. GPU를 설계한다. H100, H200, B200, 그리고 차세대 Blackwell Ultra. 데이터센터 AI 가속기 시장의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 젠슨 황이 1993년에 창업했을 때는 게임용 그래픽 카드 회사였다. 2012년 딥러닝이 GPU로 학습된다는 것이 증명되면서 게임이 바뀌었다.

AMD. NVIDIA의 영원한 도전자다. MI300X, MI350으로 데이터센터 AI 시장에 도전한다. CPU(EPYC)와 GPU를 모두 설계한다. MI300X는 HBM 192GB로 H100(80GB)보다 메모리가 크다. 대규모 모델 추론에서 강점이 있다. 2024년 데이터센터 GPU 매출이 전년 대비 세 배 이상 늘었다. 메타, 마이크로소프트가 NVIDIA 의존을 줄이기 위해 대량 도입했다. 그러나 CUDA 생태계의 벽이 높다. AMD의 ROCm은 라이브러리 호환성과 개발자 커뮤니티에서 아직 CUDA에 뒤진다.

퀄컴(Qualcomm). 모바일 칩의 왕이다. 스냅드래곤이 세계 스마트폰의 절반 이상에 들어간다. AI PC 칩(Snapdragon X)으로 새 시장을 노린다. 자율주행, 로봇용 칩에도 진출한다.

브로드컴(Broadcom). 네트워크 칩과 맞춤형 AI 칩(ASIC)을 설계한다. 구글의 TPU, 메타의 MTIA 설계를 돕는다. 화려하지 않지만 시가총액이 1조 달러에 달한다.

ARM. 칩을 설계하지 않고, 칩 설계의 설계도(IP)를 판다. 세계 스마트폰 칩의 99퍼센트가 ARM 아키텍처를 쓴다. 애플 M시리즈, 퀄컴 스냅드래곤, 삼성 엑시노스 모두 ARM 기반이다. 소프트뱅크가 소유하고 있다.

이 회사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설계만 한다. 공장은 TSMC에 맡긴다. 그래서 TSMC가 멈추면 이 회사들 모두가 멈춘다.

4.2 EDA — 설계 도구의 과점

팹리스 회사들이 칩을 설계하려면 EDA(Electronic Design Automation) 도구가 필요하다. 이 도구 없이는 설계 자체가 불가능하다.

EDA 시장은 세 회사가 장악한다. 시놉시스(Synopsys), 케이던스(Cadence), 지멘스 EDA(구 멘토그래픽스). 이 세 회사의 합산 점유율이 75퍼센트를 넘는다.

시놉시스와 케이던스의 시가총액이 각각 700~900억 달러에 달한다. 반도체 설계 회사가 아니라 반도체 설계 도구 회사가 이 정도 가치를 가진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도구를 독점하면 도구를 쓰는 모든 회사에 대한 레버리지를 가진다는 뜻이다.

미국이 대중국 수출통제에서 EDA 도구도 포함시킨 이유가 여기 있다. 중국 기업이 시놉시스와 케이던스의 최신 도구를 쓰지 못하면, 최첨단 칩 설계가 불가능해진다. 장비뿐 아니라 도구도 무기가 된다.

EDA에 AI가 도입되고 있다. 칩 설계의 배치(Place & Route)에 강화학습이 쓰인다. 구글이 2021년 Nature에 발표한 논문이 이 분야의 시작이었다. 시놉시스의 DSO.ai, 케이던스의 Cerebrus가 AI 기반 설계 최적화 도구다.

여기서도 매트릭스의 교차가 보인다. 반도체 설계(축 1)에 디지털 AI(축 2)가 침투한다. AI가 더 좋은 AI 칩을 설계하는 재귀 구조다.

잠시 멈추고 생각해보자 EDA 도구 세 회사가 전 세계 모든 반도체 설계의 관문이다. 만약 이 세 회사가 미국 회사가 아니었다면, 미국의 대중국 수출통제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4.3 파운드리 — TSMC의 압도적 위치

파운드리(Foundry)는 남의 설계를 받아 칩을 만들어주는 회사다. 이 시장에서 TSMC의 위치는 절대적이다.

TSMC의 글로벌 파운드리 점유율은 60퍼센트를 넘는다. 최첨단 공정(7나노 이하)으로 좁히면 90퍼센트 이상이다. 애플, NVIDIA, AMD, 퀄컴, 브로드컴, 미디어텍. 세계의 모든 주요 팹리스가 TSMC의 고객이다.

왜 TSMC가 이렇게 강한가. 세 가지 이유다.

첫째, 기술 선도. TSMC는 3나노 공정을 가장 먼저 양산했다. 2나노 GAA 공정도 가장 먼저 준비하고 있다. ASML의 EUV 장비를 가장 잘 활용하는 회사이기도 하다.

둘째, 수율 관리. 같은 장비를 쓰더라도 수율(양품률)이 다르다. TSMC의 수율은 업계 최고다. 이것은 수십 년간 축적된 공정 노하우의 결과다. 데이터로 축적된 암묵지다.

셋째, 고객 신뢰. TSMC는 순수 파운드리다. 자체 제품을 만들지 않으므로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 삼성은 파운드리도 하고 자체 칩(엑시노스)도 만든다. 퀄컴 입장에서 삼성에 칩 제조를 맡기면 경쟁사에 설계 정보를 주는 꼴이다. TSMC에는 그런 걱정이 없다.

삼성 파운드리는 2위이지만 격차가 크다. 3나노 GAA 공정을 먼저 도입했지만 수율에서 TSMC에 밀린다. 2025년 기준 삼성 3나노 수율은 약 50퍼센트, TSMC는 약 90퍼센트로 추정된다. 이 격차가 고객 확보를 어렵게 한다.

인텔이 파운드리 시장에 진입했다(Intel Foundry Services). CHIPS Act에서 약 80억 달러의 보조금을 확보했고, 18A 공정(1.8나노급)으로 2025년 하반기 양산을 목표한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첫 외부 고객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수율 검증이 안 된 상태에서 대규모 수주는 아직 불확실하다. 인텔은 한때 세계 1위 반도체 회사였다. 2019년 시가총액이 NVIDIA의 두 배였다. 2024년에는 NVIDIA가 인텔의 30배가 되었다. 제조 경쟁력을 잃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 구조가 AI 시대에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AI 칩의 공급이 TSMC에 병목된다는 것이다. NVIDIA가 아무리 좋은 칩을 설계해도, TSMC의 생산 용량이 한계면 공급이 부족해진다. 2023~2024년 AI 칩 부족의 한 원인이 TSMC의 CoWoS 패키징 용량 부족이었다.

4.4 메모리 — 한국의 영역, HBM의 시대

메모리 반도체는 반도체 가치사슬에서 독특한 위치를 가진다. 설계와 제조를 한 회사가 모두 한다. IDM(Integrated Device Manufacturer) 구조다.

메모리 시장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세 회사의 과점이다. D램에서 이 세 회사의 합산 점유율이 95퍼센트를 넘는다. 낸드에서도 이 세 회사가 절반 이상이다(여기에 키오시아, 웨스턴디지털이 더해진다).

AI 시대에 메모리의 핵심은 HBM(High Bandwidth Memory)이다. HBM은 D램 다이를 수직으로 쌓고 TSV(관통 실리콘 비아)로 연결한 고대역폭 메모리다. NVIDIA의 AI 가속기에 반드시 들어간다. H100에 HBM3, H200에 HBM3E, B200에 HBM3E 12단.

SK하이닉스가 HBM 시장의 선두다. NVIDIA와 가장 먼저 협력해 HBM3를 공급했다. 삼성전자가 추격 중이지만, HBM3E 인증에서 SK하이닉스보다 늦었다. 마이크론은 3위다. 그러나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HBM3E를 SK하이닉스에 이어 두 번째로 양산에 성공했다. 2025년 HBM 매출이 전년 대비 수 배 늘었다. 미국 유일의 메모리 회사라는 전략적 위치도 무시할 수 없다. CHIPS Act 보조금을 받아 미국 내 D램 공장을 확장하고 있다.

HBM의 전략적 중요성은 무엇인가. AI 가속기의 성능이 컴퓨팅 파워뿐 아니라 메모리 대역폭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빠른 GPU라도 데이터를 빨리 읽어오지 못하면 계산이 멈춘다. HBM이 이 병목을 푼다. 그래서 HBM 수요가 AI 투자와 직결된다.

2025년 HBM 시장은 전년 대비 두 배 이상 성장했다. 2026년에도 성장이 계속될 전망이다. SK하이닉스와 삼성의 HBM 사업부가 각 사의 이익을 견인하고 있다.

잠시 멈추고 생각해보자 한국이 메모리 반도체에서 강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AI 시대의 메모리는 과거의 메모리와 다르다. HBM은 패키징 기술이 핵심이다. 한국의 메모리 우위가 AI 시대에도 유지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4.5 수직 통합의 유혹과 분업의 힘

반도체 산업에는 두 모델이 공존한다. 설계와 제조를 분리하는 팹리스-파운드리 모델, 그리고 설계와 제조를 합치는 IDM 모델.

IDM의 대표가 인텔이다. 오랫동안 인텔은 설계도 하고 제조도 했다. 그것이 강점이었다. 그런데 2010년대 후반 인텔이 제조에서 뒤처지면서 이 모델의 약점이 드러났다. 설계팀이 아무리 좋은 아키텍처를 만들어도, 제조팀이 따라가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삼성도 IDM이다. 메모리에서는 IDM이 합리적이다. 메모리는 범용품이라 많은 고객의 다양한 설계를 받을 필요가 없다. 자체 설계, 자체 제조가 효율적이다.

팹리스-파운드리 분업은 다른 강점이 있다. NVIDIA는 설계에만 집중할 수 있다. 수십 조 원의 팹 투자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TSMC는 제조에만 집중할 수 있다. 수백 개 고객의 다양한 설계를 만들면서 공정 기술을 축적한다.

AI 시대에 흥미로운 움직임이 있다. 빅테크들이 자체 칩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구글의 TPU, 아마존의 Trainium/Graviton, 마이크로소프트의 Maia, 메타의 MTIA. 이것은 수직 통합의 새로운 형태다. 서비스 회사가 칩까지 설계한다. 그러나 제조는 여전히 TSMC에 맡긴다.

이 추세가 NVIDIA에게는 위협이다. 고객이 경쟁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NVIDIA는 CUDA 생태계와 소프트웨어 스택으로 방어한다. 하드웨어만으로는 이길 수 없는 해자를 만든 것이다.

4.6 권력의 지도 — 누가 누구에게 의존하는가

이 장을 정리하며, 설계와 제조의 권력 관계를 그려보자.

NVIDIA는 TSMC에 의존한다. TSMC가 없으면 NVIDIA의 칩이 나오지 않는다.

TSMC는 ASML에 의존한다. ASML의 EUV 없이는 최첨단 공정을 돌릴 수 없다.

NVIDIA는 SK하이닉스와 삼성에 의존한다. HBM이 없으면 AI 가속기를 조립할 수 없다.

모든 팹리스는 시놉시스와 케이던스에 의존한다. EDA 도구 없이는 설계가 불가능하다.

이 의존 관계의 네트워크가 반도체 산업의 권력 지도다. 그리고 이 지도에서 가장 많은 의존을 받는 회사가 가장 큰 권력을 가진다. TSMC, ASML, 시놉시스. 이 세 회사가 반도체 가치사슬에서 가장 대체하기 어려운 존재들이다.

한국은 이 지도에서 어디에 있는가. 메모리(삼성, SK하이닉스)에서는 최상위 권력을 가진다. HBM에서 대체 불가능한 위치다. 그러나 파운드리에서는 TSMC에 밀리고, 팹리스에서는 글로벌 존재감이 약하고, EDA에서는 전무하고, 장비에서는 제한적이다.

이것이 한국 반도체 산업의 구조적 위치다. 강한 곳은 매우 강하지만, 약한 곳이 너무 많다. 이 불균형이 기회인가 위협인가는 19장에서 다시 다룬다.


핵심 정리

반도체 산업은 팹리스(설계)와 파운드리(제조)의 분업 구조로 작동한다. NVIDIA가 설계하고 TSMC가 만든다. 이 분업이 AI 시대의 핵심 축이다.

EDA 도구(시놉시스, 케이던스, 지멘스 EDA)는 모든 반도체 설계의 관문이며 미국이 독점한다.

TSMC는 최첨단 파운드리에서 90% 이상의 점유율을 가진다. 삼성과 인텔이 도전하지만 격차가 크다.

HBM은 AI 시대 메모리의 핵심이며, SK하이닉스가 선두, 삼성이 추격, 마이크론이 3위다. 한국이 가장 강한 영역이다.

빅테크의 자체 칩 설계(구글 TPU, 아마존 Trainium)가 새로운 추세이지만, 제조는 여전히 TSMC에 의존한다.

반드시 답해봐야 할 질문 5가지

질문 1. TSMC의 지배력은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삼성이나 인텔이 따라잡을 수 있는가?

질문 2. NVIDIA의 CUDA 생태계는 AMD나 빅테크 자체 칩에 대한 충분한 해자인가? 그 해자가 무너지는 시나리오는 무엇인가?

질문 3. HBM 수요가 계속 성장한다면, SK하이닉스와 삼성 중 누가 더 큰 수혜를 볼 것인가?

질문 4. EDA 시장에 중국이나 오픈소스 대안이 등장할 수 있는가? RISC-V의 확산이 ARM과 EDA 구도를 바꿀 수 있는가?

질문 5. 팹리스-파운드리 분업 모델이 앞으로도 최선인가? 수직 통합으로 돌아가는 회사가 나올 수 있는가?

더 깊이 탐구하기

TSMC Annual Report 및 Technology Symposium 자료. 파운드리 기술 로드맵의 1차 자료.

NVIDIA Investor Day Presentation. AI 칩 전략과 CUDA 생태계의 방향.

SK하이닉스 HBM 기술 백서. HBM3E, HBM4의 기술적 세부 사항.

Synopsys/Cadence Annual Report. EDA 시장의 구조와 AI 도입 현황.

IC Insights / TrendForce 반도체 시장 데이터. 파운드리, 메모리 점유율의 정량적 근거.


다음 장에서는 반도체 가치사슬의 뒤쪽으로 간다. 후공정과 패키징. 과거에는 부가가치 낮은 영역으로 무시당했다. 그런데 AI 시대에 이 영역이 갑자기 가장 뜨거운 격전지가 되었다. HBM과 어드밴스드 패키징이 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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